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네딕토 16세 (문단 편집) ===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 === ||<:>[[파일:external/i30.photobucket.com/1977Romeconsistory2_zpsf7381bf2.jpg|width=100%]] ||<:>[[파일:external/popes-and-papacy.com/JohnPaulIII.jpg|width=100%]] ||<:>[[파일:external/resources.osv.com/0505_JohnPaulBenedict.jpg|width=100%]] || ||<:>[[바오로 6세]]와 라칭거 추기경, [[1977년]] [[6월 27일]] ||<:>[[요한 바오로 1세]]와 라칭거 추기경 ||<:>[[요한 바오로 2세]]와 라칭거 추기경 || [[파일:external/www.quovadiscroatia.com/cardinal-joseph-ratzinger.jpg]]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발탁돼 [[바티칸]]에 입성'''했다. 그때부터 현대 사회의 [[무신론]], 세속주의와 상대주의, [[프리메이슨]] 등 [[가톨릭교회]]의 근본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반교회적 주장 및 단체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남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열풍을 잠재우고, [[교황무류성]]에 대한 의혹과 맞서 싸운 게 대표적 예다. 또한 1983년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documents/rc_con_cfaith_doc_19831126_declaration-masonic_lt.html|프리메이슨 단체들에 관한 선언]]을 통해 프리메이슨에 대한 교회의 단죄를 재확인했다. 그는 훗날 "(신앙교리성에 들어올 때) 로마의 직무 가운데 유쾌하지 않은 임무들은 상당 부분 내가 떠맡아야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했다"고 털어놓았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적지 않은 진보 성향의 [[사제]]들 및 신학자들이 '''[[해방신학]]'''을 지지했지만, [[교황청]]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분석도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고, 복음이 계급투쟁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며 훈령 [[http://www.cbck.or.kr/Documents/Curia/Read?doc=401423&doctype=1&gb=C&search=%ED%95%B4%EB%B0%A9%EC%8B%A0%ED%95%99|자유의 전갈]]과 [[http://www.cbck.or.kr/Documents/Curia/Read?doc=401410&doctype=1&gb=C&search=%ED%95%B4%EB%B0%A9%EC%8B%A0%ED%95%99|자유의 자각]]을 통해 거듭 '''경고'''했다. 특히 라칭거 [[추기경]]은 일부 사제들이 반정부군에 합류하거나 교도권에 정면 도전하는 것을 보고, 이를 "마르크스 혁명의 시초"라고 판단했다. 라칭거는 유명한 해방신학자들을 [[바티칸]]으로 소환하여 논쟁을 벌이며 "교회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지 말라"고 다그쳤던 전력도 있었다.[* 실제로 [[해방신학]] 자체가 [[남미]]의 불평등한 사회 환경에서 태동하여 신학적으로 다소 논리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 진보적인 신학자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해방신학]]을 지지하지는 않는 편이다.] 게다가 [[교황]]에 대한 비판은 절대 용납하지 않은 탓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함께 했던 진보 신학자인 [[한스 큉]]이 [[교황무류성]] 교의를 정면으로 비판하자, 그의 수업 및 저서 출판 금지를 결정하는 데도 관여했다. ''' '전차 추기경' '''이란 별명도 이러한 전력 때문에 생긴 것이다. '''[[여성]] [[사제]] [[성품성사|서품]]''' 문제만 하더라도, [[교황청]]은 「논 포수무스(Non Possumus) 등 교령과 사목서한을 통해 여러 차례 '''불가''' 입장을 밝혔다. 여성 차별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그는 > "여성 사제서품은 우리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틀을 (모두 [[남성]]인) [[12사도]]로 하셨고, 그 후계자로는 [[주교]]와 사제가 있습니다. 교회의 이 틀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 예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에 따르는 것이 순명이며, 오늘날 상황에서는 매우 힘든 순명의 행위입니다."(대담집 「세상의 빛」 230쪽) 라고 말했다. 그리고 [[신앙교리성]] 장관시절 교황청 신앙교리성, 경신성사성, 성직자성과 함께 [[https://cbck.or.kr/Documents/Curia/401424?gb=title&search=%EC%97%AC%EC%84%B1%20%EB%B6%80%EC%A0%9C|여성 부제서품에 관한 공지]]를 발표해 "교회의 규율에는 여성 부제서품 가능성이 없으므로, 어느 모로든 부제서품을 위하여 여성 후보자를 준비시키는 교육 계획의 착수는 합법적이지 못하다"고 공지하였다. [[파일:external/www.ncregister.com/johnjayreport_(1).jpg]] 또한, 1960년대 성혁명이 일어나는 시대적 문화적 조류를 타고 일부 성직자들이 타락하여 아동 [[성추행]]이 급증하기 시작했는데, 위 도표에서 주목할 것은 성직자의 아동 성추행 건수와 기소 건수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한 해이다. 바로 1981년도이다. 그 해는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지 2년째 되는 해이자, 라칭거 추기경이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된 해이다. 라칭거 추기경이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맡아 일을 처리하면서 타락한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건수가 급격히 줄어, 1995년 이후에는 대부분의 쥐구멍이 차단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신학적 오류와 싸우고, 교설(巧說)을 배격, 교회의 부패에 맞서 싸우는''' 동안, 그에게 중세시대 [[이단심문관]] 이미지가 씌워지면서 적지 않은 비난도 쏟아졌다. 그럴 때마다 그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지, 신학자들의 실험장이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대내외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재위기간 동안 20년이 넘게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수행하여 신임을 굳게 인정받았다. 일부에서는 이를 빗대어 라칭거를 '요한 바오로 3세'라고 부르기도 했다. 교황청 표준 교리서인 [[가톨릭 교회 교리서]](1992년)와 교리 공식 요약서(2005년)의 편찬을 총괄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교리 공식 요약서는 그가 교황에 즉위한 직후인 2005년에 반포되었다. 추기경 시절에 작성된 각종 서신 등의 영문판에는 [[개정표준역 성경|RSV]] [[영어]]성경이 표준 성경으로 인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NRSV]] 영어성경과 NAB 영어성경 시편 개정판이 [[미국]] 가톨릭에서 전례용으로 승인받은 것을 철회시킨 데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https://www.catholicculture.org/culture/library/view.cfm?recnum=5297|참고]] 영어의 성 중립적 표현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고 한다.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cdds/documents/rc_con_ccdds_doc_20010507_liturgiam-authenticam_en.html|Liturgiam authenticam]]을 참조할 것. 그나마 NRSV, NAB, NJB 성경의 개인통독, 연구용으로의 인가까지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의 극보수 성향은 아닌 듯. 사실 NRSV 같은 성경은 개인통독, 연구용으로는 별 문제가 없다는 덧말도 한 바 있다. 다만, 전례용으로서는 다소 문제가 있다는 입장일 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